넌 최고니깐 일류니깐 뭐든지 할 수 있어!

영화 ‘혜옥이’는 MZ 세대들의 공부 트라우마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탓에 ‘위플래쉬’ 신림동 버전이란 찬사를 들었습니다. IMF때 망해 가압류 스티커가 붙어 있던 주인공의 집이 상징적으로 오버랩되는데요.

남편과 이혼 후 홀로 딸을 키우던 엄마의 대리만족 집착을 담은 영화 ‘혜옥이’는 감독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하이퍼리얼 스토리입니다. 고시공부를 한 번이라도 해봤다면.. 취업준비로 N차 시험만 몇 년째라면.. 이해할 극한 공감력을 얻고 있습니다.

고려대를 졸업하고 행정고시를 준비하려는 라엘(이태경)은 엄마와 신림동에 방에 보러 다니고 있습니다. 공인중개사가 소개해 준 마지막 집. 마음에 들지 않는 방이 있었지만 이 집에서 합격해서 나갔다는 말을 듣던 엄마는 바로 계약했지요.

그렇게 신림동의 작은 옥탑에 라엘의 자취방을 마련해 주었는데요. 서울 야경이 아름답지만 라엘은 책상 앞에 앉아만 있으라 낭만을 즐길 여유가 없었습니다.

준비한지 얼마 안돼 1차 합격하는 기염을 토한 라엘은 힘이 났습니다. 아빠없이 홀로 라엘 뒷바라지에 열중하는 엄마(전국향)를 기쁘게 해주려고 더 열심히 했던 라엘은 얼마 후 자꾸만 떨어지게 되는데요.  어느새 N차 고시생이 되어 신림동을 떠나지 못하는 귀신이 되어버렸습니다.

엄마는 “괜찮아, 다음에 더 잘하면 되는 거야! 넌 할 수 있어!”를 연발하며 라엘을 더욱 밀어붙이게 되는데요. 독서실에 앉기만 하면 재채기가 나오는 이상한 일은 아마도 라엘의 큰 트라우마를 겪은 후유증이라고 할 수 있겠죠. 라엘은 심리적 압박을 받으며 공부를 포기하고 싶어 하죠.

그러면 그럴 수록 뒤틀린 욕망에 사로잡힌 엄마는 집착하게 됩니다. 종교적 이름이었던 라엘이란 이름을 버리고 영엄한 불교 이름 ‘혜옥’으로 부르고자 하는데요. 본인의 실패를 딸아이가 대물림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지자..마치 성에 갇힌 ‘라푼젤’이 한국에서 환생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본인이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식에게 투영하는 무서운 엄마의 모습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낯설지 않은 풍경이기에 몰입도를 높입니다. IMF로 무너진 꿈과 현실을 딸을 통해서라도 이루려고하는 엄마. 안정적인 공무원이 최고라며, 넌 인류니까 할 수 있다는 응원은 어쩐지 끔찍하게만 들립니다.

이게 바로 ‘매몰 비용의 오류’ 극중 라엘이 듣는 인터넷 강의 속 강사가 몇 번씩이나 설명하는 주제인데요. 과거에 투자한 노력, 시간, 비용이 아까워 포기하지 않고 지속하는 일에 대한 의사결정 과정을 말합니다.

라엘.. 아니 혜옥은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 ‘매몰 비용의 오류’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영화는 장편 데뷔를 위해 고군분투했던 박정환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요. 실제 6년 동안 행시를 하면서 느꼈던 것들을 스토리에 녹여 내었고, 제작자이자 PD인 누나의 옛이름에서 영감받아 촌스러운 이름 ‘혜옥이’를 탄생시킵니다.

누구나 겪어 봤을 법한 트라우마를 중심으로, 이를 극복하기위한 주인공의 발버둥을 함께 하게 되는데요. 인트로에 담긴 돼지우리에 갇힌 돼지의 모습과 옥탑방에 갇힌 혜옥이가 대비되며, 어쩐지 슬픈 청춘의 모습 같아 씁쓸해지기만 합니다.

딸 역할을 맡은 이태경 배우는 엄마의 강요로 수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외동딸 라엘을 맡아 사실감을 높였습니다. 불안정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라엘의 목표가 점차 합격이 아닌 엄마로부터의 해방이 되어버린 기이한 모녀 관계를 디폴트 표정에 담아 사실감을 높였습니다.

엄마 역할을 맡은 전국향 배우는 30년 연기 경력을 자랑하는 베태랑 배우의 역할을 유감 없이 보여주고 있는데요. 도박으로 인생을 말아먹은 전남편을 끔찍이도 싫어하면서 정작 자신은 딸의 인생으로 도박하고 있는 설정이 아이러니한 캐릭터입니다. 우리 주변에 흔한 희생 하면서도 욕망에 충실한 어머니의 모습을 연기해 섬뜩함을 자아냅니다.

제47회 서울독립영화제 최고 화제작인 영화 ‘혜옥이’는 오는 12월 8일 개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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